가마쿠라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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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마쿠라 막부는 1185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실질적으로 성립시킨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이다. 요리토모는 1192년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가마쿠라 시대를 통해 무사 정권으로 자리 잡았다. 막부는 수호 설치를 통해 치안을 유지하고 전국적인 지배권을 확립했으나, 1333년 호조씨가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의 연합군에 멸망하며 종말을 맞았다. 막부의 통치 구조는 쇼군, 집권, 연서, 평정중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고케닌 제도를 통해 무사들을 통솔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 이후 무로마치 막부와 에도 막부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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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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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가마쿠라 막부 |
로마자 표기 | Kamakura bakufu |
건국 시작 | 1185년, 1192년 등 (제설 있음) |
멸망 | 1333년 |
이전 국가 | 헤이안 시대 |
이후 국가 | [[파일:Imperial Seal of Japan.svg|18px]] 겐무 신정 |
수도 | 헤이안쿄 (천황의 궁궐), 가마쿠라 (쇼군 거주지) |
공용어 | 중세 일본어 |
종교 | 신불습합 일본 불교 선불교 진종 니치렌 불교 |
정치 | |
정치 체제 | 이원 통치 체제 봉건제 세습 군사 독재 세습 섭정 통치 체제 |
천황 | 고토바 천황 (1183–1198) 고다이고 천황 (1318–1339) |
쇼군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1192–1199) 모리쿠니 친왕 (1308–1333) |
집권 | 호조 도키마사 (1199–1205) 호조 모리토키 (1326–1333) |
중앙 정부 | |
기구 | 집권 정소 사무라이소 문주소 평정중 |
지방 행정 | |
지방 조직 | 슈고 지토 육파라탐제 |
역사적 사건 | |
단노우라 전투 | 1185년 4월 25일 |
호조 씨 섭정 설립 | 1203년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쇼군 임명 | 1192년 8월 21일 |
가마쿠라 포위전 | 1333년 5월 18일 |
통화 | |
통화 | 료 |
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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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192년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면서 가마쿠라 막부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요리토모의 권력과 통치 기구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실질적인 성립은 1185년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전에는 일본 첫 무사 정권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헤이케 정권의 뒤를 잇는 무사 정권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요리토모는 무사 정권의 성립을 명확하게 선언하지 않아, 후세 연구자들 사이에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시기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는 가마쿠라 막부가 무사 정권으로서 체제를 정돈하기까지 몇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1180년 가마쿠라에 오쿠라 고쇼가 건설되고, 막부 통치 기구의 원형인 사무라이도코로가 설치되어 무사 정권의 확립이 형성되었다. 이후 곤다이나곤 겸 우근위대장에 임명되어 만도코로 설치 허가를 얻어 통치 기구로서의 합법성을 띠게 되었고, 1192년 정이대장군 작위가 하사되었다. 단노우라 전투(1185년)로 헤이케 일족을 멸망시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가마쿠라 시대를 통해 명실상부 무사 정권으로서 성립했다. 막부의 지배는 수호 설치로 내부 치안 유지를 담당했지만, 초기에는 한정적이었지만 점차 범위를 확대하여 조큐의 난이나 원나라의 침입 등에서 전국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1333년 호조씨가 아시카가 다카우지,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의 연합군에 멸망하고 막을 내렸다. 이전의 약 150년간을 가마쿠라 시대라고 한다. 막부라는 무사 정권 형태는 후에 무로마치 막부와 에도 막부로 계승되었다.
1180년(지쇼 4년) 12월 12일, 가마쿠라 오쿠라 향에 요리토모의 저택인 오쿠라 고쇼가 설치되었고, 막부 통치 기구의 원형인 사무라이도코로가 설치되어 무가 정권의 실체가 형성되었다.[7] 1183년 조정은 요리토모에게 간토 지역 쇼엔·공령의 관물·연공 납입을 보증하게 하고, 간토 지배권을 공인했다.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시를 멸망시킨 후, 분지의 칙허로 요리토모에게 수호·지두직 설치·임면을 허가했다. 1190년 요리토모가 권우대납언 겸 우근위대장에 임명되어 공경에 오르고 공문소 개설 권한을 얻게 되면서 통치 기구로서의 합법성을 확보했고, 1192년 세이이타이쇼군 선하가 이루어졌다. 막부는 수호 설치로 지방 치안 유지를 담당했지만, 초기에는 서일본에서 조정 및 그 출장 기관인 국부, 사원과의 삼중 지배 상태였지만, 점차 범위를 확대했다. 조큐의 난과 원구를 거쳐 전국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2. 1. 막부 성립과 미나모토 정권
일반적으로 가마쿠라 막부는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왔으나, 요리토모의 권력과 통치 기구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따라서 최근에는 1185년에 실질적으로 막부가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가마쿠라 막부는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현재는 헤이케 정권의 뒤를 잇는 무사 정권으로 평가받고 있다.요리토모는 무사 정권의 성립을 명확히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시기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는 가마쿠라 막부가 무사 정권으로서의 체제를 갖추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1180년(지쇼 4년) 가마쿠라에 오쿠라 고쇼(大倉御所)가 건설되고, 막부 통치 기구의 원형인 사무라이도코로(侍所)가 설치되면서 무사 정권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이후 요리토모는 곤다이나곤(權大納言) 겸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에 임명되어 공경(公卿) 반열에 오르고, 장원 영주의 정무 기관인 만도코로(政所) 설치 허가를 받음으로써 통치 기구로서의 합법성을 확보했다. 1192년에는 정이대장군 작위가 하사되었다. 특히 단노우라 전투(1185년)에서 헤이케 일족을 멸망시킨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가마쿠라 막부는 가마쿠라 시대를 거치며 명실상부한 무사 정권으로 자리 잡았다. 막부는 수호(守護)를 설치하여 내부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지만, 초기에는 그 지배 범위가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조큐의 난과 원나라의 침입 등을 거치면서 점차 전국적인 지배권을 확립해 나갔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1180년(지쇼 4년) 12월 12일 가마쿠라 오쿠라 향에 요리토모의 저택인 오쿠라 고쇼가 설치되었고, 막부 통치 기구의 원형인 사무라이도코로가 설치되어 무가 정권의 실체가 형성되었다.[7] 조정은 1183년(주에이 2년) 10월 선지를 통해 요리토모에게 간토 지역 쇼엔·공령의 관물·연공 납입을 보증하게 하고, 요리토모의 간토 지배권을 공인했다.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시를 멸망시킨 후, 같은 해 분지의 칙허를 통해 요리토모에게 여러 지방에 대한 수호·지두직 설치 및 임명 권한을 부여했다. 1190년(겐큐 원년) 요리토모는 권우대납언 겸 우근위대장에 임명되어 공경 반열에 오르고, 쇼엔 영주의 가정 기관인 공문소(후의 정소) 개설 권한을 얻어 통치 기구로서 합법성을 확보했다. 1192년(겐큐 3년)에는 세이이타이쇼군 선하가 이루어지면서 명실상부한 무가 정권이 성립되었다.
초기 가마쿠라 막부는 가마쿠라 덴을 중심으로 하는 무사 중심의 지방 정권이었으며, 간토 지역을 중심으로 지배가 이루어졌다. 조큐의 난 이후 전국적인 정권으로 발전하며 권력을 확대했지만, 처음부터 전국 정권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고, 조정 권력을 전제로 한 지방 정권이었다. 이는 가마쿠라 막부가 쇼엔 궁령제를 전제로 한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1185년(겐랴쿠 2년) 3월 24일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를 멸망시킨 요리토모는 조적(朝敵) 토벌 공로로 헤이케 소유 쇼엔, 즉 헤이케 몰관령의 지배권을 요구하여 승인받았다. 이후 이 쇼엔은 가마쿠라 덴 직할 쇼엔인 관토 고료(関東御領)가 되었다. 헤이케 멸망 후 요리토모에게 반기를 든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삼촌 미나모토노 유키이에가 고시라카와 법황에게서 요리토모 토벌 인선(院宣)을 받자, 요리토모는 조정에 항의했다. 그리고 자신이 추천한 공경을 기주(議奏)로 삼아 조정 정치를 담당하게 하고, 요시쓰네·유키이에 토벌 인선을 발급하게 했다. 또한 관동 및 기나이(畿内)에 수호와 지토(地頭)를 설치하고, 쇼엔·궁령에 관계없이 반별 5승(反別五升)의 병량미 징수권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하여 분지의 칙허를 받아냈다.
이후 요리토모는 오슈 후지와라 씨를 멸망시키고, 1190년(겐큐 원년) 11월 권다이나곤 겸 우코노에다이쇼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삼위(三位) 이상 공경에게 허용되는 가정 기관 세이쇼 설치가 공적으로 인정되었다. 요리토모는 기존에 독자적으로 설치했던 고몬쇼를 세이쇼로 개칭하고, 관직 우코노에다이쇼의 약칭인 우다이쇼(右大将)를 따라 우다이쇼 가세이쇼(右大将家政所)라 칭했다. 이로써 요리토모 개인의 관직 복귀나 관동 사타권(東国沙汰権)에 기반했던 가마쿠라의 관동 정권은 조정 공인 가정 기관의 지위를 얻고 통치 기구로서 정당성을 확보했다. 1191년 1월 15일 가마쿠라로 돌아온 요리토모는 연두 행사와 축하 행사를 겸한 킷쇼시를 실시하고, 우다이쇼 가세이쇼를 관할하는 사등관(四等官)을 임명했다. 세이쇼벳토에는 오에 히로모토, 령(令)에는 니카이도 기요마사, 안주(案主)에는 후지이 토시나가, 지가지(知家事)에는 나카하라 미쓰이에가 임명되었다. 몬쥬쇼시쓰지에는 미요시 요시노부, 지소 벳토에는 와다 요시모리, 지소 쇼시(侍所所司)에는 카지와라 카게토키가 임명되었다. 공사 부교인(公事奉行人)에는 후지와라 친요 외 6명, 교토 수호에는 외척이자 공경인 이치조 요시야스, 진세이 부교인(鎮西奉行人)에는 아마노 도오카게가 임명되어 가마쿠라 막부의 진용이 정비되었다.
1192년 7월 12일 요리토모는 조정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었다. 『산가이키』에 따르면, 요리토모가 원한 것은 “다이쇼군”이었고, 조정에서는 “소관(惣官)”, “세이토다이쇼군”, “세이이타이쇼군”, “죠쇼군”의 네 가지 후보를 검토했다. 타이라노 무네모리가 임관했던 “소관”과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임관했던 “세이토다이쇼군”은 불길한 사례로 제외되었고, “죠쇼군”은 일본에 선례가 없어 사카노우에 타무라마로가 임관했던 “세이이타이쇼군”이 좋은 사례로 선택되었다.[47]
2. 2. 호조씨의 집권과 조큐의 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199년 예기치 못한 사고로 사망하면서 미나모토 씨의 세력이 약해졌다. 요리토모의 미망인 호조 마사코의 아버지이자 요리토모의 전 보호자였던 호조 도키마사는 요리토모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섭정(執權(しっけん), 시켄) 자리를 차지하여 결국 이를 호조 씨의 세습직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호조 마사코는 아들 요리이에 대신 비공식적이지만 매우 강력한 지위를 차지하여 사람들은 그녀를 "니쇼군(아마쇼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성장하면서 실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하자 친어머니인 호조 씨와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막부 내에 상당한 긴장을 초래했다.[11]1201년, 조 씨는 겐닌의 난에서 미나모토 씨를 타도하려 했지만 실패했다.[12] 결국 도키마사는 요리이에를 폐위하고 그의 동생인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새로운 쇼군으로 세우고 스스로 시켄의 자리를 차지했다. 사네토모는 당시 12세에 불과했기에 사실상 권력은 그의 어머니인 호조 마사코가 쥐고 있었다. 미나모토 씨는 명목상의 쇼군으로 남았고, 호조 씨가 실권을 장악했다. 1204년, 요리이에의 충신들이 호조의 지배를 무너뜨리려고 봉기를 일으켰지만 호조 씨는 반란군을 진압하고 요리이에를 암살했다.[11]
1205년, 호조 도키마사는 사네토모를 폐위하고 사위를 새로운 쇼군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그의 딸인 호조 마사코는 이를 자신의 지위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 사위의 살해를 공모하고 아버지를 절로 유배 보냈다.[11] 1219년, 사네토모는 조카인 구교에게 암살당했다. 사네토모는 자식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미나모토 씨 출신 쇼군의 계보는 그를 끝으로 단절되었다.[11][12] 이 시점부터 호조 씨가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12]
1219년 사네토모가 죽자 그의 어머니인 호조 마사코는 막부의 실질적인 권력 중심으로 계속 활동했다.[1]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섭정과 쇼군은 바뀌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실권을 쥐고 있었다. 호조 가문은 자기 가문 사람을 쇼군으로 임명할 자격이 없었기에 마사코는 편리한 꼭두각시를 찾아야 했다.[15] 미나모토 씨의 먼 친척인 구조 요리쓰네를 네 번째 쇼군이자 명목상의 지도자로 삼고 호조 요시토키가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15] 앞으로 쇼군은 권력이 없더라도 혈통을 순수하게 유지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항상 후지와라 가문이나 황족에서 선택되었다.[15] 이러한 계승은 100년 이상 계속되었다.[15]
결과적으로 가마쿠라 막부는 섭정과 사실상의 찬탈이라는 특이한 피라미드 구조에 기반을 두었다. 즉, 실질적인 통치자인 호조 섭정은 미나모토 씨로부터 권력을 찬탈했고, 미나모토 씨는 고코 천황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했으며, 고코 천황은 세이와 천황의 자녀로부터 권력을 찬탈했다. 동시에 섭정, 쇼군, 천황은 모두 명목상의 지위를 유지하고 서로 공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는 총 135년 동안 9명의 쇼군과 16명의 섭정을 거치면서 상당히 안정적인 것으로 증명되었다.[16]
1221년, 고토바 천황은 조큐의 난|조큐노란일본어이라고 불리는 사건에서 권력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22] 호조 씨의 권력은 1324년 고다이고 천황이 그들을 타도하기 위한 음모를 꾸밀 때까지 도전받지 않았지만, 그 음모는 거의 즉시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16]
2. 3. 원나라의 침입과 막부의 쇠퇴
1274년과 1281년, 쿠빌라이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해상 침략을 시도했다.[17]50년 전, 막부는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고려의 요구를 수용했고,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양국 간의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고려는 몽골군의 점령으로 무력한 상황에서 일본에 많은 정보를 제공했고, 일본의 스파이들이 한반도에서 보낸 정보와 함께 막부는 몽골 침략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18] 막부는 쿠빌라이의 항복 요구를 경멸적으로 거절했다. 1274년 몽골군의 상륙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일본군은 4만 명에 달하는 몽골군과 고려 징집군 연합군을 크게 압도하며 패배하지 않았다. 폭풍이 임박하자 고려 제독들은 함대를 해안에서 보호하기 위해 몽골군에게 재승선할 것을 권고했고, 엄청난 태풍으로 몽골군의 3분의 1이 궤멸되었다.[19]
잔여 병력이 몽골 영토로 돌아간 후, 쿠빌라이는 일본을 몽골의 지배하에 두겠다는 의도를 버리지 않았고, 다시 항복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냈다. 이는 호조씨의 분노를 사, 사신들을 처형하게 만들었다. 호조 씨는 방어를 위한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하카타 만의 배후지를 보호하기 위한 성벽을 건설하고, 방어 기지를 설치하고, 주둔 목록을 작성하고, 본토의 병력을 서쪽 방어로 재배치했으며, 침략군의 함대를 공격하기 위한 함선을 건조했다.
1281년 몽골군은 몽골, 고려, 중국군 5만 명과 패배한 송의 남중국 지역에서 징집한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돌아왔다. 이들은 규슈 여러 지역에서 7주간 일본군과 싸웠지만, 일본군은 이들을 막아냈고, 몽골군은 전략적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태풍이 접근하자, 고려와 중국군은 몽골군과 함께 공해상에서 폭풍을 헤쳐나가려 했다. 8월 15일~16일 이틀간 몽골군의 3분의 1 이상, 그리고 송나라 징집군의 절반 정도가 궤멸되었다. 수천 명의 침략군이 제때 승선하지 못하고 사무라이들에게 학살당했다. 병력과 물자의 손실, 그리고 두 차례의 침략에 대한 고려의 국력 소진으로 몽골의 일본 정복 시도는 종식되었다.[20] "신풍" 또는 가미카제는 외국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구원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후 20년간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재침을 경계했다. 그러나 군사적 긴장과 재정적 지출은 막부를 크게 약화시켰다. 또한, 방어 전쟁은 전투에 참여한 무사들에게 돌아갈 이익이 없어 불만을 야기했다. 방어벽 건설은 이미 긴축된 막부에 추가적인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었다.[21]
2. 4.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에 맞서 무력을 행사했으나, 가마쿠라의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패배하여 오늘날 시마네현에 속하는 오키섬으로 유배되었다.[22] 이후 한 무장이 유배된 천황을 구출하려 했고, 이에 호조씨는 다시 다카우지가 지휘하는 군대를 교토로 보냈다.[22] 그러나 다카우지는 그곳에서 뜻을 바꾸어 고다이고 천황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22] 동시에 천황에게 충성하는 또 다른 무장인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16] 약 870명의 호조 씨 일족, 마지막 세 명의 섭정을 포함하여 그들의 가족 사찰인 도쇼지(현재 오마치에 유적이 남아있다)에서 자결했다.[16]겐무 3년/쇼케이 2년(1333년) 4월, 반막부 세력 토벌을 위해 교토로 파견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나가오카 다카이에가 구게나와테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보고, 고다이고 천황 측에 붙어, 5월 7일에 로쿠하라 단다이를 함락시켰다.

육파라 함락 다음 날, 닛타 요시사다가 우에노국에서 거병하여, 150기였던 군세는 관동 고케닌의 지지를 얻어 수일 만에 대군이 되었다. 이에 대해, 막부는 사쿠라다 사다쿠니・나가사키 다카시게 등을 장군으로 하여 토벌군을 조직하고, 대군으로써 이를 격퇴하려 했으나, 고테사시하라 전투, 구메가와 전투에서 패했다. 호죠 야스이에의 원군이 가세한 후에도, 분베가와하라 전투, 세키도 전투에서 패하여, 막부군은 가마쿠라로 패주하였고, 닛타 군은 가마쿠라로 압박해 들어왔다.
5월 18일, 닛타 요시사다는 대군(군기물어에서는 과장 표현으로 수십만이라고도 한다)으로 가마쿠라를 공격 개시하였고, 방어하는 막부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가마쿠라 전투). 당일, 몰린 집권 아카하시 모리토키가 자결하는 등 하였으나, 지형을 이용한 막부군의 격렬한 저항에 닛타군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5월 21일, 닛타 요시사다가 이끄는 군세가 간조를 이용하여 이나무라가사키를 돌파하여 가마쿠라 시내로 쇄도하였다. 양군은 시내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22일까지 다이부츠 사다나오, 가나자와 사다마사, 후온지 모토토키 등 막부군의 유력 무장들이 잇달아 전사·자결하였다.[50][51] 이미 막부의 운명이 다한 것을 느끼고 한 행동인가, 호조 다카토키・가나자와 사다아키라, 나가사키 엔키・나가사키 다카스케・아다치 토키아키라 등 일족・가신 283명은 동승사(가마쿠라 시)에 집결하여, 절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였다(도쇼지 전투)[52]。같은 날, 모리쿠니 친왕은 쇼군직을 사퇴하고 출가하였다. 3일 후인 5월 25일에는, 규슈의 진제이 단다이도 반막부 세력으로 돌아선 쇼니 사다쓰네와 오토모 사다무네, 시마즈 사다히사 등에 의해 함락되었다.
3. 통치 구조
가마쿠라 막부는 초기에 가마쿠라 덴을 중심으로 하는 무사 중심의 지방 정권이었으며, 그 지배는 간토 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큐의 난(1221) 이후 전국적인 정권으로 발전하여 권력을 확대했지만, 처음부터 전국 정권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고 조정의 권력을 전제로 하는 지방 정권이었다.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가마쿠라 막부가 장원공령제를 전제로 하는 정권이었기 때문이다.[69]
지방에서 토지를 사유하는 무사단의 기원은 743년 조정이 조세 징수를 위해 발포한 간전영년사재법으로 토지 사유가 공인되면서 시작되었다. 유력 농민들은 국인의 가혹한 징세를 피하고자 중앙 조정의 구교(公卿)에게 토지를 기진하고, 자신들은 장원의 장관(개발영주)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장원영주로부터의 갈취, 국사와의 마찰, 인근 호족의 침략이 끊이지 않아 농민들은 점차 무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무사 계층 탄생의 요인이 되었다.
이들은 미나모토노 아손이나 다이라노아손 등 군사 귀족을 도료(棟梁)로 받들고 주종 관계를 맺어 본령안도나 영지 경영, 도적 단속 등을 담당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이러한 무사단을 통솔하는 명문가 출신으로, 가마쿠라 막부는 고케닌이 된 무사에게 지토 직책을 주어 본령안도를 행하고 무공에 따라 새로운 영지를 주는 신은급여를 행했다. 이는 장원공령제를 매개로 하는 것으로, 고케닌에 대한 어은(御恩)과 상급자에 대한 봉공(奉公)에 따라 무사의 이해를 대표하는 정권이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정치, 군사, 경제적 기반은 요리토모가 헤이케 추토의 은상 등으로 얻은 간토 지행국, 간토 어령이었다.[69]
가마쿠라 막부가 조정 권력을 전제로 성립했다는 두 번째 이유는 율령 법제상의 다양한 존립 근거를 채우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요리토모는 모치히토 왕의 영지를 근거로 헤이케 추토를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1183년 조정은 요리토모에게 종5위하 관위를 돌려주고, 동국 지역에서 헤이케의 장원, 공령 횡령을 폐지하고 옛 고쿠시나 장원영주에게 귀속시키는 권한(동국재량권)을 승인했다. 이를 위해 도고쿠의 지방관인 고쿠가를 지휘할 권능도 인정했는데, 이것이 주에이 2년 10월 선지이다.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를 멸망시킨 요리토모는 헤이케 몰관령의 지배권을 요구하여 승인받고, 가마쿠라도노 직할 장원인 간토 어령을 획득했다. 또한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미나모토노 유키이에가 고시라카와 법황에게서 요리토모 추토의 인젠을 받자, 요리토모는 조정에 압력을 가해 요리토모 추천 구교들을 의주로 삼아 조정 정치를 담당하게 하고, 요시쓰네, 유키이에 추토의 인젠을 발급하게 했다. 또한 도고쿠 및 기나이에 슈고, 지토 설치를 허가하고 장원, 공령에 상관없이 反別五升의 병량미 징수 권한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분지의 칙허이다.
이후 요리토모는 오슈 후지와라 씨를 멸망시키고 1190년 곤노다이나곤 겸 우콘노에노타이쇼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요리토모는 3위 이상의 구교로 인정받고 자신의 가정 기관인 만도코로 설치를 공인받아 공문소를 만도코로로 고치고 우대장가정소라 칭했다. 가마쿠라의 도고쿠 정권은 조정이 공인한 가정 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얻고 통치 기관으로서의 정당성을 획득한 것이다. 1191년 요리토모는 우대장가정소의 사등관으로 오에노 히로모토를 만도코로벳토, 니카이도 유키마사를 령, 후지이 도시나가를 안주, 나카하라 미쓰이에를 지가사로 임명했다. 미요시 요시노부를 문주소집사, 와다 요시모리를 사무라이도코로벳토, 가지와라노 가게토키를 사무라이도코로쇼시, 후지와라노 지카요시 외 6인을 공사봉행인, 이치조 요시야스를 교토 슈고, 아마노 도카게를 진서봉행인으로 임명하여 가마쿠라 막부의 진용을 갖추었다.
1192년 요리토모는 조정으로부터 정이대장군 선하를 받았다. 『산괴기』에 따르면 요리토모가 바란 것은 「대장군」이었고, 조정에서는 「총관」,「정동대장군」,「정이대장군」,「상장군」 네 가지 후보를 검토한 결과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임관했던 「정이대장군」이 선택되었다고 한다. 정이대장군은 군권에 기초한 정권 담당자라는 의미가 더해져 막부 주재자에게 세습됨으로써 가마쿠라 막부는 조정을 대신하는 정권으로 확립되었다. 또한 전시에 일본 전국의 병마를 동원할 수 있는 정이대장군 임명은 요리토모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한 것을 의미했다.[70]
가마쿠라 막부는 조정의 공적인 제도인 장원 공령제를 전제로 하여 조정으로부터 여러 권한을 승인, 위양받아 성립한 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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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9년 급사했고,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뒤를 이었으나, 유력 고케닌들은 십삼인의 합의제라는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이 합의제의 중심에는 요리이에의 외척인 호조 씨가 있었고, 호조 도키마사, 호조 요시토키 부자는 다른 유력 고케닌을 차례로 제거했다.
1203년 요리이에는 호조 도키마사에 의해 유폐되었고, 동생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쇼군이 되었으며, 1204년 요리이에는 암살당했다. 도키마사는 3대 쇼군 사네토모를 보좌하여 싯켄 지위에 올라 정치 실권을 장악했다. 1205년 도키마사는 사위 히라가 도모마사를 쇼군으로 세우려다 아들 요시토키와 호조 마사코의 반발로 은퇴했다.
이후 호조 요시토키가 싯켄이 되었으나, 와다 요시모리가 대항 세력으로 등장했다. 요시토키는 1213년 와다 일족을 멸망시켰다. 1219년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암살당하면서 요리토모의 직계가 단절되자, 막부는 조정에 친왕 쇼군을 요구했지만 고토바 상황은 이를 거부하고, 셋칸가 출신 후지와라노 요리쓰네를 새 쇼군으로 맞이했다. 이후 2대의 가마쿠라 덴은 셋케 쇼군이라 불린다. 이로써 막부의 실권은 싯켄인 호조씨가 장악하게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존립은 무사, 특히 간토 무사단을 기반으로 했다. 이들은 “가마쿠라도노”(장군)의 가신이 됨으로써 막부의 구성원이 되었고, 이들을 고케닌이라 불렀다. 가마쿠라도노와 고케닌의 주종 관계는 고온토부코라 불리는 상호 이익 관계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이 제도를 고케닌 제도라고 한다.
- 고온(御恩): 가마쿠라도노가 고케닌의 소령 지배를 보장하거나(본령안도) 새로운 토지를 지급하는 것(신온급여)을 말한다. 고케닌을 지토로 임명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 부코(奉公): 고케닌이 가마쿠라도노에게 부담하는 군역, 경제적 부담 등을 말한다. 긴급 시 군역, 교토오반야쿠(京都大番役), 가마쿠라반야쿠(鎌倉番役), 이코쿠케이고반야쿠(異国警固番役), 쵸슈케이고반야쿠(長門警固番役), 간토오공사(関東御公事) 등이 있었다.
주종 계약은 고케닌이 가마쿠라도노에게 견참했을 때 명부 제출에 의해 이루어졌고, 막부는 고케닌 명부로 고케닌을 관리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다음과 같은 독자적인 경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 관동어성패지(関東御成敗地)
- 관동어령(関東御領)
- 관동어분국(関東御分国)
- 관동진지소령(関東進止所領)
- 관동어구입지(関東御口入地)
가마쿠라 막부의 주요 직제는 다음과 같다.
4. 역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는 1192년부터 1199년까지 재임한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이다.[26] 요리토모 사후,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源頼家)가 1202년부터 1203년까지 2대 쇼군으로 재임했지만,[27] 호조 마사코 가문의 호조 씨와 권력 다툼 끝에 암살당했다.
요리이에의 동생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実朝)는 1203년부터 1219년까지 3대 쇼군으로 재임했으나,[28] 실권은 어머니 호조 마사코가 쥐고 있었다. 1219년 사네토모가 암살당하면서 미나모토 씨 쇼군 계보는 단절되었다.
이후 호조 씨가 실권을 장악, 미나모토 씨의 먼 친척인 후지와라노 요리쓰네(藤原頼経)를 4대 쇼군(1226년–1244년 재임)[29]으로 세우고, 호조 요시토키가 섭정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다. 후지와라노 요리쓰구(藤原頼嗣)(1244년–1252년 재임)[30]가 5대 쇼군을 이었다.
이후 쇼군은 후지와라 가문이나 황족에서 선택되었다. 무네타카 친왕(宗尊親王)(1252년–1266년 재임)[31], 코레야스 친왕(惟康親王)(1266년–1289년 재임)[32], 히사아키 친왕(久明親王)(1289년–1308년 재임)[33], 모리쿠니 친왕(守邦親王)(1308년–1333년 재임)[34] 등이 쇼군직을 계승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섭정이 실권을 쥐는 특이한 구조였다. 호조 섭정은 미나모토 씨, 미나모토 씨는 고코 천황, 고코 천황은 세이와 천황의 자녀로부터 권력을 찬탈했다. 섭정, 쇼군, 천황은 명목상 지위를 유지하며 공존했고, 이 체제는 135년간 유지되었다.[16]
역대 섭정(執權)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위 기간 |
---|---|
호조 도키마사(Hōjō Tokimasa) | 1203년–1205년[35] |
호조 요시토키(Hōjō Yoshitoki) | 1205년–1224년[36] |
호조 야스토키(Hōjō Yasutoki) | 1224년–1242년[37] |
호조 쓰네토키(Hōjō Tsunetoki) | 1242년–1246년[38] |
호조 도키요리(Hōjō Tokiyori) | 1246년–1256년[39] |
호조 나가토키(Hōjō Nagatoki) | 1256년–1264년 |
호조 마사무라(Hōjō Masamura) | 1264년–1268년 |
호조 도키무네(Hōjō Tokimune) | 1268년–1284년[40] |
호조 사다토키(Hōjō Sadatoki) | 1284년–1301년[41] |
호조 모로토키(Hōjō Morotoki) | 1301년–1311년[42] |
호조 무네노부(Hōjō Munenobu) | 1311년–1312년 |
호조 히로토키(Hōjō Hirotoki) | 1312년–1315년 |
호조 모토토키(Hōjō Mototoki) | 1315년–1316년 |
호조 다카토키(Hōjō Takatoki) | 1316년–1326년[43] |
호조 사다아키(Hōjō Sadaaki) | 1326년 |
호조 모리토키(Hōjō Moritoki) | 1326년–1333년 |
호조 사다유키(Hōjō Sadayuki) | 1333년 |
5. 평가 및 관련 연구
가마쿠라 막부는 무가 정권이었지만, 당시에는 "막부"라는 명칭으로 불리지 않았다. 조정과 공가는 관동(関東)이라 칭했고, 무사들은 가마쿠라도노(鎌倉殿), 일반 백성들은 무가(武家)라고 불렀다. "막부"라는 용어는 원래 장군의 진영이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무가 정권을 "막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에도 시대 후반, 막말(幕末)부터였다. "가마쿠라 막부"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1887년(明治20년) 이후로 여겨진다.[56]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주요 시점은 다음과 같다.
- 1180년: 요리토모가 동국 지배권 수립
- 1183년: 동국의 지배권을 사실상 승인하는 선지가 내려짐
- 1184년: 공문소와 문주소 개설
- 1185년: 수호·지두의 임명을 허가하는 칙허가 내려짐
- 1190년: 일본국 총 수호 지두로 임명
- 1192년: 정이대장군에 임명
21세기 들어 학교 교육 현장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연도를 1192년에서 1185년으로 변경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1185년 설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분지의 칙허가 수호·지두 임명을 허가한 것이라는 견해를 부정하는 연구자도 있어, 다른 설에 대해서도 이견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학자 가와아이 야스시는 가마쿠라 막부가 여러 단계를 거쳐 성립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을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으로 규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58] 이러한 논의를 거쳐, 제국서원 등의 검정 교과서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이 단계를 밟아 정비되었으며, 성립 연도에 대해서는 1192년에 "명실상부하게 '완성되었다'"라는 표기를 채용하고 있다.[59]
근대 이후 역사 연구에서는 중세 무가 시대를 왕조 문화가 쇠퇴한 암흑 시대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원 승랑과 이시모토 마사시 등의 연구로 중세는 일본에 봉건제가 성립한 시대로 여겨지게 되었고, 동국 무사단은 그 개혁의 추진력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사토 신이치(佐藤進一)의 동국 독립 국가론과 쿠로다 토시오(黒田俊雄)의 권문 체제론이 등장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권문 체제론 일색"이라는 상황이었으며, 사토 자신도 죠큐의 난(承久の乱)까지의 가마쿠라 막부는 "조정의 충견으로서 일하는 권문 체제적인 상황"에 있다고 인정했다. 사토는 1983년에 다시 동국 독립 국가론을 제기했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 평가를 얻지 못했고, 권문 체제론과의 유사성을 지적받았다. 권문 체제론은 21세기에도 유력한 학설로 중시되고 있다. 다만, 사토와 쿠로다 모두 “가설”로서 동국 국가나 권문 체제를 주장했을 텐데 그 “가설”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양설 모두 학설로서 독자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本郷和人에 따르면, 가마쿠라 막부는 관동 지방의 토착 영주들이 토지 소유를 보장받기 위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숭배하며 세운 정권[67]이 실태이며, 정권이 안정되면서 토착 영주들에게 미나모토 씨는 필요없어져 배제되었고, 요리토모의 직계는 단절되었다[68]고 한다.
나가이 신(永井晋)에 따르면, 호조 고토키는 정치를 돌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병약했기 때문에 정치 현장에 나가기 어려웠고, 측근들은 개혁보다는 안정성을 중시하여 고토키의 보좌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점차 정권이 쇠퇴해 갔다. 나가이는 고토키 정권 붕괴 이유로 다음 네 가지를 제시한다.
- 기후 변화: 13세기 말부터 지구 기후가 중세 온난기에서 소빙기로 변동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이러한 냉각화에 대처하는 정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천황가 내부 모순: 양통 딜립(両統迭立)이라는 천황가의 내부 모순에 휘말렸다.
- 경제 문제: 화폐 경제 침투에 따라 고케닌(御家人) 제도가 파탄되고 있었다.
- 막부 중추부의 개혁 소극성: 상월 소동(霜月騒動), 헤이젠몬의 난(平禅門の乱), 카겐의 난(嘉元の乱) 등 잇따른 내분으로 피폐해진 막부는 조정형의 능리(能吏)를 중심으로 협조 노선을 걷게 되었다.
나가이는 "이 수뇌부가 가마쿠라 막부의 실력이 충실했던 중기에 정권 운영을 했다면, 고토키는 평화로운 좋은 시대를 건설한 정치가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요구하고 있었던 것은 새로운 사회 구조로의 이행이었다. 이러한 의식의 차이가 좌절의 큰 원인이 된다"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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